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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 정태인 님의 글
1.파김치는 이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하철 탈 엄두가 나지 않아 멍한 상태로 섰는데 택시 한 대가 스르르 와서 멈춘다.
친분을 믿어서适?일정을 확인해 주지 않는 바람에 부랴 부랴 부산 강연 일정을 조정해서, 쫓기듯 두 건을 연달아 하고 비행기로 김포, 그리고 택시로 숭실대까지 허둥댄다. 언제나 그렇듯 일단 마이크를 잡고 말을 시작하면 어디 피로를 느낄 겨를이 있을까.
학생들, 시민들, 철거민들... 질문을 받고 인사를 하고, 동작구 위원장의 뒷풀이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하고 교문을 나선다. 휘청... 몸이 잦아 드는데 택시가 스르르 와서 멈춘다.
끌리듯 문을 열고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정태인 선생님, 저 방금 강의 들었습니다” “저는 택시노련 아무개입니다” 꿈 결인듯, 차분하달까 어눌하달까 저음으로 사근 사근 말을 붙인다.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은 하얗게 센 머리... 그러나 다부진 몸의 그는 필경, '내내 수줍어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투사로 나타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고 혼자 상상한다.
FTA에 대한 질문에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덧 오목교를 건넜다. “아...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죠” “아닙니다. 이렇게 강연을 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데요. 저 같은 사람도 인사는 할 수 있어야죠”
그가 떠나고 난 또 다시 멍하니 교차로에 서 있다.
신림 4거리 4번 출구로 나오니 요지경이다. 여기가 그 추레했던 신림4거리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이 어지럽다. 계속 가다 보면 관악복지관이 있다고 했다. 휘황한 조명은 잠깐, 다리를 건너며 갑자기 30여년 전의 신림동이 나타난다.
대도시건, 시골이건 구나 군 단위에 문화회관, 복지회관, 또는 여성회관이 생긴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좋을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로 시설도 괜찮다.
강연을 마치자 한 분이 질문을 하는데 어쩐지 낯이 익다. “민주노동당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심상정 의원은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서 FTA 얘기 많이 합니다” “그러지 말고 당원이 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웬지 집요해 보여서 말을 끊으려 농담을 한다. “그 뭐죠? **파가 없어지면 들어갈게요” (이 농담이 인터넷에서 ‘찻잔 속의 태풍’ 정도의 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복지관 문을 나서니 한 분이 다가 선다. “오늘도 모셔 드리겠습니다” 아... 그였다. “아니요. 오늘 근처에 약속이있어서요”
언제나 성실한 후배가 신림 4거리 쪽에 기다리고 있다. 옛 시장 쪽을 찾아 가니 다닥 다닥 붙어 있던 곱창집은 기업이 되어 있었다.
2.문성현 대표는 없었다. 100만명의 서명 용지가 담긴 상자로 쌓은 벽 앞에 앉을 자리가 마련돼 있는데 임자는 어디로 갔을까. 혹 병원에 실려 간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도 잠시라도 청와대가 보이는 자리가 싫은 나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에게 전화를 건다. “대표는 안 보이고 바로 옆에 있던 천막도 없어졌는데 무슨 일인지”, 연락을 해 달라며 경찰의 검문선을 넘어 간다.
잠깐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더니 전화가 온다. 황사 때문에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고. 천막은 선물 가게 뒤쪽을 살펴 보란다. 다시 검문선을 넘는데 경찰이 제지를 한다. “문성현 대표 만나러 갑니다” “당원이신가요?” 잠깐 머뭇거리던 나, “네”
문대표가 로터리에 나와 있다. 사진이나 찍으려고 일부러 나오셨단다. 천영세의원과 나란히 사진을 찍으며 “당원 되자마자 대표하고 사진 찍으니 벼락 출세했네요” “...?...” 잠깐 전의 단막극을 이야기하니 형편없이 말라버린, 검은 색의 얼굴로 문대표는 파안대소 한다.
또 협상 마감 시한이 연장될 수 있다는 얘길 어떻게 할까? 50 중반의 사내에게 24일의 단식은 이미 생명의 위험선을 넘나 들게 하고 있을 것이다. “힘들지 않아요. 아니, 힘은 좀 들지만 타결이 되든, 결렬이 되든, 거기까진 가야지” 그의 인생을 버텨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이 바로 이런 책임감에서 나온 것일까.
..쇠고기는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5월 국제수역사무국 발표를 빌미로 우리 정부가 뼈있는 쇠고기도 수입하려고 이미 마음 먹은 것 같으니까요. 단지 문서로 약속하느냐, 구두로 하느냐인데, 이면 합의를 한 전례가 적지 않으니, 그렇게 합의가 되겠지요.
.. 의회가 나서서 자동차 마지노선을 그었는데, 80가지 이상을 요구한 것 같습니다. 자동차 관련 우리나라 제도는 모두 바꾸라는 거지요. 그런다고 미국 차 수입이 늘어날 것 같지도 않은데 시장점유율과 관세인하를 연계시킨 겁니다. 우리가 관세를 포기할테니, 너희도 잡다한 요구를 접어라. 이 선에서 자동차 분야 협상은 접자... 애초에 서로 균형잡힌 요구를 했다면 똑같이 거둬 들이면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나가면 걔들도 할 말이 없을텐데, 우리 협상단한테 이런 배짱은 없겠지요?
주섬 주섬 상황을 설명하며, "따라서 협상 마감이 이틀 정도 또 연기될 수도 있다”고 예방주사 놓는 의사처럼 말한다.
“예? 분신이요? 민주노동당원, 허...세...욱이라구요?” 전화를 받는 대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강 성심병원으로 그가 떠났다. 허... 세... 욱... 어디서 들은 이름이더라.
인권연대 오창익국장이 천막으로 들어선다. 오늘 하이야트 호텔에서 나오다 잠깐 마주쳤는데 내가 이리로 간다고 하니 들른 모양이다.
“분신 장면 봤어?” “예. 경찰이 휴대용 소화기로 바로 꺼서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키는 작고 50대쯤 되어 보이던데...택시노련 소속이래요”
문성현 대표에게 말한다. “제가 제일 두려워 하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빨리 성명 내세요. 절대로 아무도 죽으면 안 된다고... 살아서 이 긴 싸움 을 끝까지 싸워내야 한다고...”
허세욱 동지. 꼭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겨야 합니다. 이 말도 안되는 싸움을... |